존재의 얼굴에서 스쳐 지나간 그 미세한 ‘웃음’은
인간의 표정을 흉내 내기엔 너무 매끄럽고,
감정을 담기엔 너무 기계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표정을 알아보았다.
너무도 선명하게.
“말도 안 돼…”
입술이 바짝 말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네가… 날 지시한 게… 너였다고?”
존재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움직임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 자체가 정답보다 더 선명했다.
머릿속에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차갑고 단정한, 나를 조종하던 그 목소리.
“우리는 네가 필요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존재였다.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몸이 떨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왜 나였지?”
질문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왜 나를 선택한 거야!”
이제서야 존재가 움직였다.
공기를 가르는 듯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리며 내게 말했다.
“너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말은 칼날처럼 가슴에 꽂혔다.
나조차 몰랐던 내 단면을,
이 존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네가 감정을 억누르는 능력,
위기 속에서도 판단을 멈추지 않는 성향,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의 몸에서 어둠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네가 가진 결정적인 순간의 용기.”
“그 모든 것이… 우리가 필요로 했던 조건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그런 사람 아니야.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존재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평범한 사람이 그날 그 버튼을 눌렀을까?”
숨이 턱 막혔다.
그날의 마지막 장면이
마치 물속에서 끌어올려지는 듯 선명해졌다.
내 손가락 끝.
경고음.
불안하게 깜박이는 붉은 표시등.
그리고
주저함도 없이 버튼을 누르는 내 모습.
도망친 게 아니라,
교란된 것도 아니라,
그 선택은 분명 내 의지였다.
나는 무너져 내리듯 바닥에 손을 짚었다.
“…왜 그랬던 거지…
왜 내가 그런 선택을…”
그때, 존재가 내 앞에 무릎을 굽혀 몸을 낮췄다.
안개 같은 얼굴이 가까워지며
그 안에서 불빛 같은 흔적이 깜박였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존재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졌다.
길고, 가늘고, 이상하게 따뜻한 손.
“여기서 나와라.”
순간, 방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이 갈라지는 듯한 울음소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먼지.
구체가 흔들리며 밝았던 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존재는 다시 말했다.
“밖에서는…
네가 찾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잡는 순간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더는 이 방에 남아 있을 이유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 존재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감촉.
그러나 이상하게… 익숙했다.
그러는 순간
바닥의 금속판이 완전히 갈라지며
밑으로 끝없는 어둠이 열렸다.
존재는 한 마디만 남겼다.
“기억을 완성하자.”
그리고 우리는
어둠 속으로 함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