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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LE

Y-9

by 아싸너구리 2025. 12. 11.

기계가 깨어나는 소리가 연구실 전체를 울렸다.
경고음이 낮게, 깊게, 심장을 때렸다.
마치 그날의 메아리가 다시 재생되는 듯한 기분.

하지만 이번엔
그때와 달랐다.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왜 버튼을 눌렀는지,
누굴 막으려 했는지,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지.

팀 리더였던 그는
기계의 바로 옆에 서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는 더는 울리지 않았다.
사람처럼, 아주 낮고 조용하게 울렸다.
“…너 혼자가 아니다.”

나는 숨을 고르고 기계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이 갈 때마다 바닥에 금속음이 울렸다.
공기가 진동했고, 기계는 불규칙한 빛을 쏟아냈다.

내 손을 떼어낼 수도 없었다.
운명처럼 이끌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기계는 나를 알고 있었고,
나도 이 기계를 알고 있었다.

그때, 존재가 갑자기 말했다.

“기억해라.
너는 그날… 나를 막았다.”
“그리고 이제
내가 너를 막지 않겠다.”

나는 그의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는 나를 믿지 않았다.
그 불신이 비극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나에게 선택을 넘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만약… 내가 다시 버튼을 눌러도?”
“너는… 이번에도 사라질 수도 있어.”

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이 네 것이라면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그 말은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후회가 있었다.

나는 기계를 바라보았다.

기계 내부에서 빛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빛 속에는 수많은 영혼과 의식이 뒤엉켜 있었고,
그중에는…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고음이 더 빠르게 울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시간이 없다.

나는 버튼 근처에 손을 올렸다.
차갑고 익숙한 감촉.
그날 마지막으로 느꼈던 온도였다.

손끝을 떨며, 나는 속삭였다.

“…내가 왜 다시 이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해한 것 같아.”

존재는 천천히 다가와 내 옆에 섰다.

“그렇다면
너의 선택을 말해라.”

공기는 뜨거웠다.
기계가 숨을 쉬는 듯, 진동이 몸 전체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억 속 나’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음에 깨어난 나에게
진실을 전해줘.”

그 진실은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나는 눈을 뜨고 버튼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번엔, 끝내러 가는 게 아니야.”
“이번엔 시작하러 가는 거야.”

그리고
나는 버튼을 눌렀다.

찰칵.

기계가 울부짖었다.
빛이 천장을 찢고, 연구실을 가르는 균열이 퍼졌다.
기계의 내부에서 무언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존재가 소리쳤다.

“붙잡아! 기계가 완전히 열리고 있어!”

나는 손을 놓지 않았다.
빛은 날 삼키려 했고, 어둠은 나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 순간
존재가 내 손을 덮었다.
찬 기계와, 따뜻한 그의 손 사이에서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둘의 의식이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계 내부의 공간
그곳은 어둠도, 빛도 아니었다.
시간조차 의미가 없는 공간.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체도, 그림자도 아닌
순수한 의식의 파동.

내가 아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오랫동안 기다렸다, 새로운 조율자.”

나는 숨을 삼켰다.

새로운… 조율자?

기계의 중심에서 거대한 진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건 이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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